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스히코 요시카즈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박하]]를 재배하던 [[농부]] 가정에서 태어났으며, 어렸을 땐 형이 산 소학 잡지를 읽으면서 만화에 흥미를 가져 10살 때 '[[오다 노부나가]]'에서 나온 [[카와나카지마 전투]] 장면을 노트에 [[연필]]로 그리기도 했고, 친구들부터로도 많은 만화를 빌려서 읽었고 직접 공책의 남은 페이지에 만화를 그리기도 했었다고 한다. 이때부터 역사 만화를 그리겠다는 꿈이 있었다고 한다. [* 이에 부친은 그림을 이웃들에게 보여주는 등 무척 기뻐했지만, 모친은 그런 시시한 걸 하고 있을 바엔 [[집안일]]을 하라고 했을 만큼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.] 또한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강의책의 기법들을 [[모방]]해 만화를 그려 모험왕에 투고한 적도 있었다. [[중학교]]로 들어갈 무렵 아버지가 [[뇌경색]]으로 쓰러져 반년 간 입원했으며[*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.] [[1963년]]엔 형이 대학 진학에 실패해 가업을 잇지 못하게 되자, 형제들과 같이 [[누나]]가 사는 곳에 몇 달간 잠시 머물기도 했다. 이전부터 본인이 [[웅변]]대회에서 드러낸 연설력과 [[동아리]] 행사 [[사회자]] 등의 [[학생회]] 활동으로 쌓은 명성이 작용해, 고등학교에서 [[학생회장]]으로 뽑힌 적도 있었다. 훗날엔 당시 아는 친구가 민청 활동을 하던 중이라 영향을 받아 [[이데올로기|정치성향]]을 결정했다고 언급했으며,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[[꿈]]같은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꿈을 접고 교사가 되기로 하고 졸업 후 [[가나자와대학]], [[히로사키대학]] 등에 [[원서]]를 넣어 합격한 히로사키대학의 서양[[사학과]]로 입학했다. 재학 중에 민청의 활동에 참여했지만 형식적이고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해 얼마 못가 관두고, 1968년 [[베트남 전쟁]] 반대 모임 결성 관련 강연 기획 등으로 [[평화주의]] [[학생운동]]을 전개하기도 했었다. 즉 [[제1세계]]의 전형적인 '''[[68운동|68세대]]'''였던 셈. [* 실제론 형식적인 당시 학생 운동권의 연설, 시위를 꺼려 직접 학우들한테 설명하는 방법으로 활동했으며, 이듬해 1월 일어난 [[도쿄대학]]의 [[야스다 강당]] 점거 사건에 참여한 친구가 체포되었으나 교통비가 미치지 못할 만큼 자금이 부족해 도쿄로 가지 못했다고 한다.] 이듬해(1969년) 9월 자신이 다니던 대학교 본부를 [[전학공투회의]]가 점거한 지 3주가 지나서 [[기동대]]에 의해 봉쇄가 풀렸는데, 보름간 학교에 있었던 것 때문에 여러 죄목이 적용되어 [[일본 경찰|경찰]]에 체포당했다. 이후 다니던 대학에서 제적 처분을 받고, 풀려난 뒤엔 도쿄에 있던 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사식으로 근무했으나 일이 맘에 들지 않아 석달 만에 그만둔다. 취업이 곤란해져 이 무렵 신문에 게재된 무시 프로덕션 구인 광고를 보고 어릴 때의 꿈인 만화가를 떠올려 응모해, 면접에서 대학 노트에 그렸던 만화를 보여줘 합격하여 무시 프로덕션 양성소 2기생으로 입사했다. 무시 프로덕션의 사장이 자신이 존경하던 [[데즈카 오사무]]였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무시 프로덕션에 들어간 건 우연이라고 한다. 입사 3년 뒤 무시 프로덕션이 파산한 뒤론 [[프리랜서]]로 오피스 아카데미, 소에이샤에서 활동했었고, 그 무렵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선호하지 않는 것과 더불어 "애니메이션 같은 애들이 보는 매체에 메세지를 담아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리가 없다." 라는 생각이 들어 직업에 환멸감을 느끼기도 했었으나 [[니시자키 요시노부]]가 "애니메이션은 애들만 보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다." 라고 설득하여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. 《안녕히 우주전함 야마토 사랑의 전사들》 제작 이후 일절 야마토와 관련된 제작 과정에서 손을 떼려했으나 [[니시자키 요시노부]]의 강한 만류와 반대로 이루지 못해 우주전함 야마토 2 등 [[TV판]]의 제작에도 참여하였다. 이후 《기동전사 건담》의 캐릭터 디자인 및 [[작화감독]]을 맡았는데 우주전함 야마토 시리즈의 연출 작업과 [[아리온(만화)|아리온]] 만화 연재와 스케줄이 겹쳐 중노동을 하다 도중에 과로로 쓰러져 5개월이나 입원해 후기 분량의 작업에 참여하지 못했다. 이를 아쉬워한 [[토미노 요시유키]] 감독은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 3부작을 만들기로 했고 극장판 3부작은 야스히코가 수정하지 못한 작화를 야스히코가 직접 수정하고 새로 그려 자신의 작화로 완성시켰다. 기동전사 건담은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대표작이 되었으나 야스히코는 첫 작품 이후의 건담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, [[기동전사 Z건담]], [[기동전사 건담 F91]], [[기동전사 건담 UC]]은 캐릭터 디자인은 해주었지만 작화는 하지 않았다. 야스히코가 연출과 작화까지 손댄 작품은 전부 퍼스트 건담의 파생작이다. [[1979년]]엔 《[[아리온(만화)|아리온]]》을 발표해 만화가로 데뷔하였으며, [[아니메쥬]]에 연재했던 한 에세이에서 당시 논란이 있던 [[토에이 애니메이션]]의 극장판 《FUTURE WAR 198X년》[* 《가공스런 미래전쟁》이란 제목으로, MBC에서 90년 초반 명절특선으로 더빙 방영한 바 있다.]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. 그 뒤 [[극장판]] 《[[크러셔 죠]]》로 감독으로 데뷔해 이름을 알렸다. [* 원작자인 타카치호 하루카와는 서로 친한 사이여서 부탁을 거절하진 못했으나, 나중에 굳이 극장판 제작을 하고 싶진 않았다고 말했다.] 야스히코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은 뛰어난 작화로 고정 팬이 좀 있었으나 [[비너스 전기]]가 흥행에 실패하고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잃어 애니메이션을 접고 [[1989년]] 《나무지》를 연재함으로써 만화가로 전업하기로 한다. 2001년에는 [[야마우라 에이지]]의 권유로 [[기동전사 건담]]을 야스히코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만화 [[모빌슈트 건담 디 오리진]]을 연재했다. [[2006년]]엔 고베 예술공과 대학의 미디어 표현학과 [[교수]]로 재임하기도 했었다. [[2012년]] 3월과 [[2013년]] 말엔 [[홋카이도 신문]] 석간, [[주니치 신문]], [[도쿄신문]] 석간 등지에서 《내 속의 역사》, 《이 길》을 연재했다. 이듬해 5월 [[모빌슈트 건담 디 오리진]]의 일부분을 애니화한 [[기동전사 건담 THE ORIGIN]]의 총감독을 맡으면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복귀하였다. 이어서 내놓은 [[기동전사 건담 쿠쿠루스 도안의 섬]]으로 애니메이션 감독은 은퇴할 생각이라고 밝혔다. 다만 개봉 이후 [[후루야 토오루]]가 "야스히코 씨의 건담에서 아무로를 한 번 더 하고 싶다." 라고 했고 작품에 대한 반응도 괜찮아서 복귀할까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. 후루야가 리메이크 해달라는 부분이 있다면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. [[https://ddnavi.com/interview/1051839/a/|#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